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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顶禅师美文赏析:沉默的意义(二)

沪江筱逸 2012-09-09 08:00

怎么学好一门语言?除了死记硬背单词之外,最后的方法还是多听多读,有一定的输入,才会有一定的输出。读一篇好的文章,不仅能帮助你学优美的语言,还能洗净人的心灵,本期带大家走进韩国的灵魂人物——法顶禅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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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에게 과묵이나 침국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안에 고여있는 말씀을 비로소 듣는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미처 편집되지 않은 성서인 것이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는 본질적인 의미는 아직 활자화되어 있지 않은 그 말씀까지도 능히 알아듣고 그와  같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불경에 있는 말이다.  일상의 우리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써만 어떤 사물을 인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저 침묵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일체의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허심탄회한 그 마음에서 대광명이 발해진다는 말이다.

참선을 하는 선원에서는 선실 안팎에 "묵언"이라고 쓴 표지가 붙어있다.  말을 말자는 것. 말을 하게 되면 서로가 정진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집단생활을 하다보면 때로는 시의 비를 가리는 일이 있다.

시비를 따지다 보면 집중을 할 수 없다.  선은 순수한 집중인 동시에 철저한 자기 응시인 것이다.  모든 시비와 분별망상을 떠나서만 삼매의 경지에 들게 된다.

말은 의사소통의 구실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잡음의  역기능도 동시에 하고 있다.  구시화문, 입을 가리켜 재앙의 문이라고 한 것도 그 역기능 면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선승들은 3년이고 10년이고 계속해서 묵언을 지키고 있다.  그가 묵언 중일  때는 대중에서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수도자들이 이와 같이 침묵하는 것은 침묵 그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침묵이라는 여과과정을 거쳐 오로지 "참말"만을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침묵의 조명을 통해서 당당한 말을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벙어리와 묵언자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칼릴 지브란은 우리들이 해야 할 말은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하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언어의 극치는 말보다도 침묵에 있을 것 같다.  너무 감격스러울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

그러나 사람인 우리는 할말은 해야 한다.

그런데 마땅히 입 벌려 말을  해야 할 경우에도 침묵만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한 회피인 것이다.  그와 같은 침묵은 때로 범죄의 성질을 띤다.  옳고 그름을 가려 보여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침묵은 비겁한 침묵인  것이다.  비겁한 침묵이 우리 시대를 얼룩지게 한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인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시키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는 것이다.  수도자가 침묵을 익힌 그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목, 197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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